청량산 산행기 by 별곡

※일시: 2006년 3월 25일 토요일
※날씨: 맑음
※산행코스: 선학정 주차장(10분)-입석(20분)-응진전(10분)-김생굴(30분)-자소봉(25분)-뒤실고개(35분)-장인봉(30분)-뒤실고개(20분)-청량사(20분)-선학정 주차장

12~3년 전 애들 데리고 답사여행에 한참 재미를 붙여 다닐 때, 경북의 오지(奧地) 봉화 통고산 자연휴양림에 텐트를 치고 그곳을 베이스캠프 삼아 안동의 하회마을, 병산서원, 영주의 부석사를 찾았었다. 지금도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은 병산서원과 부석사다.

차 두 대가 비키기 어려운 먼지가 풀풀 날리던 비포장의 병산서원 가는 길, 산모롱이를 돌았을 때 서원의 전각들과 산자락 밑으로 유유히 흐르던 낙동강이 보이던 그 아름다운 풍광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병산서원 만대루에 불던 서늘한 바람은 세속에 찌든 마음까지 깨끗이 씻어 주었다. 애들은 낙동강에서 물장구를 치면서 마냥 즐거워했다.
이제, 그곳에 흘렸던 애들의 웃음소리는 세월 저 너머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과나무가 많던 부석사 가는 길, 9품 만다라를 형상해서 만들었다는 부석사의 전각 배치, 그리고‘사무치는 고마움’으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바라보았던 백두대간의 파노라마는 내 마음 속에 깊이 들어와 때때로 그곳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의 원천이 되었다.

그런데 그 때, 영주와 봉화를 넘나들면서도 어쩐 일인지 청량산은 알지 못했다. 아마 그 당시는 산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 유홍준 선생이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편(1977년)’에서 ‘북부 경북 답사의 클라이맥스는 봉화의 청량산’이라는 구절을 읽고, 또한 그 책에 실린 ‘청량산과 낙동강’이라는 한 장의 흑백 풍경 사진을 보고 막연하게 청량산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 이후 청량산은 내가 늘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 하였다.

청량산을 이야기할 때 누구나 퇴계 이황의 시조
“ 청량산(淸凉山) 육육봉(六六峰)을 아나니 나와 백구(白鷗)
백구(白鷗)ㅣ야 헌사하랴 못 미들손 도화(桃花)ㅣ로다
도화(桃花)ㅣ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魚舟子)ㅣ 알가 하노라“ 를 말한다.
퇴계는 이 시조에서 청량산 육육봉, 즉 12봉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은 백구와 나뿐이라면서 청량산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이것은 퇴계가 혼자만이 청량산의 아름다움을 즐기겠다는 태도라기보다는 청량산 인근에 도산서당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고 저술에 전념하면서 학문을 닦고 인격을 수양하는데 방해 받고 싶지 않아서 이런 노래를 읊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퇴계가 남긴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12수의 시조를 보면 이러한 선생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은 전(前) 육곡(六曲) ‘언지(言志)’, 후(後) 육곡(六曲) ‘언학(言學)’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시조는 조선 시대 유학자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자연을 빌어 유교적 질서와 이상을 읊은 노래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언지(言志)' 부분의 제 1곡(曲)에서 퇴계는
“이런들 엇더하며 져런들 엇더하료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러타 엇더하료
하믈며 천석고황(泉石膏肓)을 곳쳐 무슴하리. ” 라고 하여 세속의 명예와 부귀공명을 멀리하고 자연을 매우 사랑하는 심정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언학(言學)' 부분의 제 9곡(曲)에서는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봇 뵈
고인을 못 봐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엇졀고 ” 라고 하여 학문을 탐구하고 인격을 수양하던 옛 성현(聖賢)들의 길을 그대로 따르겠다고 말한다.

또한 11곡(曲)에서는
“청산(靑山)는 엇데하야 만고(萬古)애 프르르며,
유수(流水)는 엇데하야 주야(晝夜)에 긋디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디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호리라.” 라고 한다. 이 시조 초장의 청산(靑山)과 중장의 그치지 않는 물은 변함없는 자연을 뜻하며, 그 자연을 본받아 우리 인간들도 학문을 닦고 인격 수양에 정진(精進)하여 영원히 푸른 존재로 살자고 퇴계는 역설하고 있다.

퇴계가 천석고황(泉石膏肓)-자연을 사랑하는 병-을 앓으면서까지 삶의 목표로 설정했던 ‘만고상청(萬古常靑)’의 모습은 어쩌면 유구한 세월 속에서도 변함없이 푸른 모습을 보여 주는 저 청량산을 지칭하는 말이 아닐는지.

이런저런 생각 끝에 풋잠을 깨니 머나 먼 길을 달려온 버스는 어둠 속에 잠긴 청량산 산문(山門)을 들어선다. 사위는 적막하고 캄캄한 하늘에는 성긴 별 몇 점만 반짝인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채 어둠이 가시기 전에 산행 들머리 입석으로 향한다. 입석의 비탈길을 올라채니 전망 좋은 곳이 나온다. 빈 나뭇가지들 사이로 외청량사 응진전이 보인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빈 나뭇가지의 미덕은 푸른 잎을 달고 있을 때 가려서 보여주지 않던 풍경들을 온전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오솔길 한 굽이를 돌아서자 바로 응진전이다. 쏟아질 듯이 솟은 금탑봉 절벽 아래 자리 잡은 응진전은 원효대사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이야기 전하는 곳이다. 청량산 곳곳에 선인들의 이야기가 전한다. 위압적인 암봉 아래 태연하게 자리 잡은 응진전 앞마당에서 산행객들은 참새처럼 재잘거린다.


금탑봉 밑 응진전

응진전을 끼고 오솔길을 걸어가면 최치원의 전설이 전하는 총명수를 지나 어풍대에 닿는다. 어풍대에서 바라보는 으뜸 풍경은 바로 청량사다. 좌측에서 우측으로 연화봉과 향로봉, 연적봉, 탁필봉, 자소봉이 병풍처럼 둘러쳤고 그 봉우리들을 아우르는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청량사는 분홍빛 연등을 둘러 마치 연지 곤지를 찍은 수줍은 새색시처럼 다소곳한 모습이다.


어풍대에서 본 청량사. 뒤로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이 보인다.

어풍대에서 10여 분쯤 계속해서 오솔길을 따르면 경일봉 가는 갈림길을 지나 신라시대 명필인 김생의 전설이 전하는 김생굴이 나온다. 돌무더기로 막아 놓은 김생굴은 겨우 비바람이나 피할 정도다. 김생굴을 지나 좁은 계곡을 가로지른 아치형 다리를 건너 가파른 길을 오르면 자소봉에 오르는 지능선 안부에 닿는다. 이곳에서 가쁜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보면 유난히도 탑신(塔身)이 하얀 청량사 5층 석탑과 함께 돋을볕에 붉게 물든 연화봉과 향로봉이 보인다.


김생굴

자소봉 오르는 지능선에서 본 연화봉과 향로봉. 청량사 오층탑도 보인다.

지능선 치받이를 오르면 자소봉 앞 철계단에 서게 된다. 철계단을 오르면 자소봉 중턱의 전망대다. 봉우리 꼭대기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자소봉은 수직의 절벽이라 오를 수 없다. 날이 완전히 밝았다.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탐스러운 햇살에 붉게 물든다.


자소봉 전망대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과 향로봉

자소봉 전망대를 내려와 2~3분 정도면 탁필봉에 이른다. 탁필(卓筆)은 뛰어난 필적(筆跡)이나 문장(文章)을 뜻하는 말이다. 밑에서 본 탁필봉은 꼭 먹을 묻힌 붓 같아, 금방이라도 명필(名筆) 김생이 나타나 저 탁필봉을 들어 일필휘지로 멋진 글귀를 써 내려갈 것만 같다. 이어서 연적봉에 오르니 자소봉과 탁필봉은 뒤에서 비추는 아침 햇발 때문에 실루엣으로 보인다.

연적봉을 내려와 능선길을 따르면 청량사 0.9km 이정표가 서 있는 안부가 나오는데 이 길은 폐쇄 됐다. 능선 길에서 청량산 정상인 의상봉을 보고 걷다가 급경사 철계단을 내려오면 뒤실고개다. 입석에서 이곳까지 휴식 시간을 포함해서 1시간 50분쯤 걸렸다. 여기서 좌측 길을 따르면 청량사로 내려가고 그대로 직진하면 청량산 정상인 장인봉으로 간다.


장인봉 선학봉

뒤실고개에서 장인봉으로 향한다. 뒤실고개에서 이어지는 오르막 내리막 능선 길을 따르면 전망 좋은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 서면 선학봉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 맨 앞 우뚝 솟은 암봉이 학의 머리 같다. 선학(仙鶴)이 잠에서 깨어나 금방이라도 푸른 하늘로 훨훨 날아갈 것만 같다.

이어서 협곡 같은 암벽 사이로 난 험한 길을 밧줄과 쇠난간에 의지하여 내려가면 철계단이 나오고 그 끝에 자란봉 안부가 있다. 여기서 좌측 길을 따르면 1~2분 거리에 장인봉 0.6km, 선학봉 0.3km 이정표가 나온다.

길은 다시 돌이 많은 험로(險路)다. 위에 오른 사람이 발을 잘못 디디면 돌이 굴러 내려온다. 이 길을 올라채면 다시 장인봉을 향해 내려가는 내리받이가 나오는데, 이 길은 낙엽이 수북하게 깔린 응달진 곳이라 아직 얼음이 녹지 않아 몹시 미끄럽다. 내리받이 끝 안부에 서면 이정표는 장인봉 0.3km 좌측으로 통제소 1.5km를 가리킨다. 통제소로 가는 길은 청량산 입구에 있는 청량폭포로 내려가는 하산길이다.


장인봉에 가는 험로 장인봉 정상

이곳에서 철계단을 오르면 청량산 정상 장인봉(의상봉)이다. 정상에는 돌탑과 청량산 등산로 안내판이 서 있다. 청량산 등반의 하이라이트는 정상에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장인봉 전망대에서의 조망

이곳 전망대에 서면 우리나라의 대표적 지리서 ‘산경표’의 원리인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이곳 전망대에서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곳에서 퇴계가 말한 ‘만고(萬古)에 푸른 청산(靑山)’과 ‘주야(晝夜)로 그침이 없는 유수(流水)’를 보았다.

정상에서 길을 되짚어 뒤실고개에 도착하니 왕복 1시간 30 분이 걸렸다. 이곳에서 우측 길을 따르면 청량사다. 청량사는 아름다운 절집이다. 분홍빛 연등이 절 전체를 빙 둘러쌌다. 지불(紙佛)이 봉안된 유리보전의 현판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졌다. 유리보전 밑 절 마당에 서서 위를 올려다 보니 암봉들이 절 주위를 병풍처럼 둘렀다. 앞을 보니 뿔 셋 달린 소의 무덤-삼각우총(三角牛塚)-에서 났다는 소나무와 5층 석탑 너머로 금탑봉이 보인다.



삼각우총 소나무와 청량사 5층탑 청량사


청량사 유리보전 청량산 산꾼의 집

절 구경을 하고, 청량산의 명물인 산악인의 집에 들러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산행의 피로를 푼다. 청량사에서 선학정으로 내려오는 길 옆 산비탈에는 노란 생강나무 꽃이 피었다. 청량산 깊은 산골짜기에도, 바야흐로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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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고인돌 2006/04/06 17:10 # 답글

    야...멋지네요.
    다다음 산행지 청량산으로 하고 싶은데...
    될지 모르겠네요.^^
    참 부석사의 사과나무로 가던 옛날길(저도 거의 18년전이니..) 그 흔적은 남아 있더라구요.
    지금의 일주문에서 올라가며 바로 좌측방향을 보면 한 20-30m떨어진 곳이 옛날길 같더라구요.
    아닐지도 모르지만...^^

    언제나처럼 좋은 글과 사진 잘 보고 갑니다.
  • 청산별곡 2006/04/07 09:29 #

    근자에 다녀온 분의 말에 의하면
    부석사도 옛 모습이 많이 사라지고
    대규모 관광지처럼 변했다고 하네요.
    청량산은 5월이나 아니면 가을에 가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 witan 2006/04/07 03:02 # 답글

    별곡님이 저의 결심을 굳혀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 청산별곡 2006/04/07 09:30 #

    witan님 신록의 계절이나 단풍이 곱게
    물드는 계절이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 ilsanchung 2006/04/07 23:02 # 답글

    아름다운 글 에 빠져 듭니다.
    언제나 청량산은 내 마음속에서 숨을 쉼니다.
    부석사 입구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떨어질때
    그 아름다움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감있는 청량산 산행기 좋습니다.
  • 청산별곡 2006/04/08 08:56 #

    부석사, 병산서원 사과꽃 향기가 풍기는 때나
    아니면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날릴 때쯤이나 언제 다시 한번
    가야겠습니다.
  • 빈바구니 2006/04/08 07:45 # 답글

    청량산, 청량도, 하얀 오층석탑, 그리고 이야기가 전해지는 구석구석도 모두 잘 봤습니다.
    직접 산에 오르면 이렇게 감상하지 못할 것 같아요. ^^
  • 청산별곡 2006/04/08 08:58 #

    단풍이 곱게 물들 때
    다시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빈바구니님도 아름다운 청량산
    언제 한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 樂山(락산) 2006/04/10 08:09 # 답글

    청량상 정말 옛날엔 첩첩산중일텐데...
    더군더나 지금은 여기서 음악회도 열고 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청량상 맞은 편 봉우리에서
    바라본 청량사 풍경은 절묘하지요.풍수지리상으로도
    명당이라지요.좋은 여행 하셨습니다.
  • 청산별곡 2006/04/10 10:13 #

    락산님 말씀 대로 청량산 맞은편 축융봉 쪽에서
    보는 청량산이 멋지다고 합니다.
    좀 아쉬움이 남아야 다음에 또
    찾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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