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날 by 별곡

여든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산소에 갔다.
먼지만 풀풀 날리는 마을 가게에서 소주 한 병과 종이컵 그리고 새우깡 한 봉지를 샀다.

차에서 내려 작은 저수지 둑길을 지날 때 둑길 가득 돋아난 쑥을 보고 어머니는 올 때
‘쑥 좀 뜯어가자’고 하신다.
저수지 둑길 밑에는 농장이 있다. 둑길을 지나자 사슴 우리가 나온다.
덩치가 큰 사슴은 뿔이 잘린 채 나와 어머니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냄새나는 사슴 우리를 지나서 산으로 접어든다.

산소에 가는 길섶에는 오래전 나와 아버지가 심은 소나무 전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언제 클까했던 나무들은 어느새 어른 키 두 배도 넘게 커 버렸다. 하기야 그 때 중학교
다니던 큰조카가 삼십 중반이 넘었으니, 세월 참 많이도 흘렀다. 나무를 심고 나서 날이
가물어 큰조카와 함께 물을 길어다 주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이윽고 산소에 도착했다. 아버지 무덤 위에는 쑥이 자라고 있다. 어머니와 나는 쑥을 뽑았다.
어머니는 쑥을 뽑으며 말씀하신다.
‘영감, 누워만 있지 말고 자식들 잘되게 해 줘’라고 중얼중얼 하신다.
아버지가 누운 바로 옆 자리가 어머니 자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두 분은 한 지붕을 이고
계실 것이다.

아버지 무덤 바로 뒤편 축대 위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누워 계신다.
나는 쑥을 뽑다 말고 할아버지한테 간다. 소주 1잔을 종이컵에 따르고 새우깡
봉지를 터서 놓는다. 그리고 절을 한다. 이곳은 원래 할머니 묘였다.
할머니 묘는 저 밑에 큰길가에서도 훤히 보인다.
아버지는 생전에 할머니 산소에 올 때마다 이곳에 할머니를 이장하고 내려오다 큰길가에서
할머니 묘를 올려다보니 동자 2명이 앉아 있었다고 하셨다. 그러고 나서 아들 하나에 딸 셋만
두었던 아버지는 나와 남동생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7~8년 전 할아버지를 이곳에 이장하여 할머니와 합장을 했다.

할아버지 묘를 파묘하고 이장할 때 보니 할아버지 뼈에는 검은 털이 조금씩 남아 있었고
무덤 속은 물기가 축축하게 고여 있었다. 할아버지를 할머니 곁에 누이기 위해 할머니 묘를
파묘했을 때 보니 할머니의 뼈는 얼마나 희던지. 정말 눈부시게 깨끗한 흰 뼈였다.
두 분은 지금 함께 누워 계신다. 나는 할머니 얼굴을 모른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7살 땐가
돌아가셨다 한다.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다.
지금은 갓을 쓴 할아버지의 모습만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아버지 생전에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오면 아버지는 절을 하시면서 큰 소리로
‘아버님이시여, 당신네 손자들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천추만대 길이 빛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씀 하셨다. 내 아들들은 어렸을 때,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흉내 내곤 했다.
다시 아버지 묘에 내려와 상석에 소주 한 잔을 따르고 새우깡 몇 개를 놓았다.
나는 절을 하면서 아버지가 할아버지한테 했던 그 말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날이 덥다. 대충 일이 끝나자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께 작별 인사를 하고 일어선다.
둑길에 오자 어머니는 쑥을 뜯으신다. 엊그제 쑥떡을 만들었는데 쑥 값이 꽤나 비싸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올해 여든넷인 어머니. 흔히들 말하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桎梏)의 세월을 온몸으로 살아온 '묻지마라 갑자생'이시다.

'애일(愛日)' 이란 말이 있다. '날을 아낀다'는 뜻으로 부모님의 연세가 높아서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해가 가는 것을 아낀다는 말이다.
한평생 자식을 위해 살아오신 어머니께 전화도 자주 못 드리는 나는 불효자다.
나보다도 먼저 어머니가 전화를 하신다. 어머니는 내 건강을 걱정하신다.
주객전도(主客顚倒)다. 오늘은 문득 어머니가 보고 싶다.
옛 사람들처럼 '애일(愛日)의 간절한 마음'을 갖고 살지는 못할 망정 전화라도 자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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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시인 2007/04/11 23:41 # 답글

    그래도 정정해 보이시니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 청산별곡 2007/04/12 19:20 #

    정정하시지요. 목소리도 카랑카랑하시고.
    예전에 산을 많이 다니셔서 건강하신 것 같습니다.^^
  • 碧泉(벽천) 2007/04/12 10:23 # 답글

    우리 별곡님 마음쓰심을 보니 효자입니다.
    사람은 어리석어서 살아 계실 때 잘못하고...
    돌아가시면 그때서야 후회를 하지요.
    물론 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_-;;
  • 청산별곡 2007/04/12 19:24 #

    그래서 풍수지탄(風樹之嘆)이란 말도 있지요.
    살아계실 때 잘 해야지요. 돌아가신 다음에
    진수성찬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碧泉(벽천) 2007/04/13 18:46 #

    그래서 주자십회의 처음에 나오는 지도 모르지요.

    1.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뒤에 뉘우친다.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해도 이미 늦으니, 살아 계실 때 효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뜻의 고사성어
    풍수지탄(風樹之歎)과 같다.

    2. 불친가족소후회(不親家族疏後悔)

    가족에게 친하게 대하지 않으면 멀어진 뒤에 뉘우친다.
    가까이 있을 때 가족에게 잘해야지, 멀어진 뒤에는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3. 소불근학노후회(少不勤學老後悔)

    젊어서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뉘우친다.
    젊음은 오래 가지 않고 배우기는 어려우니, 젊을 때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는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과 같은 말이다.


    4. 안불사난패후회(安不思難敗後悔)

    편안할 때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실패한 뒤에 뉘우친다.
    편안할 때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는 거안사위(居安思危)와 같은 뜻이다.

    5. 부불검용빈후회(富不儉用貧後悔)

    재산이 풍족할 때 아껴쓰지 않으면 가난해진 뒤에 뉘우친다.
    쓰기는 쉽고 모으기는 어려우니, 근검절약해야 한다는 말이다.

    6. 춘불경종추후회(春不耕種秋後悔)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뉘우친다.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이 되어도 거둘 곡식이 없다는 뜻이다.


    7. 불치원장도후회(不治垣墻盜後悔)

    담장을 제대로 고치지 않으면 도둑맞은 뒤에 뉘우친다.
    도둑을 맞고 난 뒤에는 고쳐도 소용없다는 속담
    '도둑맞고 사립 고친다'와 같은 말이다.

    8. 색불근신병후회(色不謹愼病後悔)

    색을 삼가지 않으면 병든 뒤에 뉘우친다.
    여색을 밝히다 건강을 잃으면 회복할 수 없으니 뉘우쳐도 소용없다는 뜻이다.

    9. 취중망언성후회(醉中妄言醒後悔)

    술에 취해 망령된 말을 하고 술 깬 뒤에 뉘우친다.
    지나치게 술을 마시면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되니 항상 조심하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10. 부접빈객거후회(不接賓客去後悔)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떠난 뒤에 뉘우친다.
    손님이 왔을 때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대접하지 않다가,
    가고 난 뒤에 후회해 보았자 이미 늦었다는 말이다.
  • 청산별곡 2007/04/14 19:54 #

    옛 성현의 가르침이 요즘에도
    어쩌면 그리도 똑 들어맞는지요.^^
  • witan 2007/04/13 01:45 # 답글

    별곡님의 글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미국에 계신 어머님 돌아오실 날이 손꼽아 기다려지네요.
    못뵌지 벌써 6개월이 되었는데......-_-
  • 청산별곡 2007/04/13 16:44 #

    어머니, 늘 그리운
    영원한 우리들의 고향입니다.^^
  • 새출발 2007/04/13 14:38 # 삭제 답글

    저도 비슷한 연세의 부모님이 계십니다.
    그래서인지 별곡님의 글을 읽고 뭔가을 느끼게 되는군요.
    정말 살아계실때 잘해야지....하면서 자주 잊고 살아갑니다.
    마침 오늘 우리집에 어머님이 오십니다.
    주말을 이용해서 간편한 여행 한번 해볼 계획입니다.
    좋은 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 청산별곡 2007/04/13 16:45 #

    어머님과 추억에 남을 여행하시고
    좋은 시간 보내시길.^^
  • sanagine 2007/04/19 00:25 # 답글

    두번
    놀랍니다.

    너무 고우신 어머니 모습에
    그리고 어머님과 선생님이 많이 닮아서요.

    지난 2월 설 연휴를 하루 앞두고
    암으로 투병하시던 아버님을 보내드렸습니다.

    저희 집에서 모셔왔던 터라
    지금도 가끔 아버지의 신음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긴 그렇고 해서
    정말 가까운 친구에게 털어놓았더니

    곰곰히 듣고 있다가
    무섭지 않냐고 묻더군요.

    전혀 무섭지 않다고 대답하면서
    괜한 얘기를 꺼내 놓았구나 하고 후회했습니다.

    좀 더 잘 해 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환청으로 들린다고

    스스로 진단해 봅니다만
    한편으로는 더 자주 저희 집에 오라고 기원합니다.

    살아계실때 잘 못하고
    돌아가신 후 후회하는

    어리석은 못난 놈
    넋두리로 이해해 주세요.

    어머님의 건강을 위해
    늘 기도하겠습니다
  • 청산별곡 2007/04/19 19:30 #

    고맙습니다.
    어머님하고 닮았다는 얘기 많이 듣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그림 많이 담으시길.^^
  • 고인돌 2007/04/23 23:42 # 답글

    애일....
    또하나 배우고 갑니다.
    저도 어제 아버님 산소엘 다녀왔습니다.
    어머님과 친구분은 산소에 잠시 들렸다 쑥캐러가시고...
    집사람과 아이들은 산소에서 놀다..잡초뜯다...
    저는 다시 건너편 산에 있는 할아버지,할머니 산소엘 다녀왔죠.
    그리고 나오다 논에 있는 우렁을 보고 신발벗고 들어가 열댓마리 잡아오고...
    별곡님 어머님도 정정해보이셔서 보기 좋습니다.
    저희 어머님도 여든까지는 수를 누리셔야할텐데 말입니다.^^
  • 청산별곡 2007/04/24 11:01 #

    부모의 마음보다 못한 것이 자식 마음이지요.
    고인돌님 어머님도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_()_
  • 보석공주 2007/04/26 00:02 # 답글

    아유~연세에 비해 젊고 곱습니다.
    정정하신모습이네요
    제시어머니연세랑 같으신데.....
    건강하세요~~
  • 청산별곡 2007/04/27 08:46 #

    그렇습니까.^^
    어머니께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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